20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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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여행

봄에는 ‘동백꽃’이 피는 마을로
김유정 작가의 흔적을 따라 뚜벅뚜벅

ITX-청춘을 타고 남춘천역에 내린 뒤 경춘선 열차로 갈아탄다. 한 정거장을 더 가자 아담한 시골역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부터 조금 특별하다. 김유정역. 한국철도에서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한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문학 여행의 출발점 같은 역이다. 김유정역을 시작으로 작가의 흔적을 따라 걸어본다.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로, 천천히, 뚜벅뚜벅.

역명에 사람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역

김유정역은 원래 신남역이라는 이름의 작은 간이역이었다. 1939년 경춘선이 놓일 때 생긴 평범한 시골역이었지만 한 사람 덕분에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 바로 소설가 김유정이다. 그는 <봄봄>, <동백꽃>, <금 따는 콩밭> 같은 작품을 통해 강원도 농촌의 삶을 따뜻하면서도 익살스럽게 그려낸 작가다. 그의 소설에는 사투리와 풍경,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하자면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문학 배경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지역 주민들은 ‘작가의 고향에 그의 이름을 남기자’는 뜻을 모았고, 2004년 신남역은 김유정역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한국철도 역사(歷史)에서 처음으로 사람 이름이 역명이 된 순간이다.

김유정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옥 형태의 역사(驛舍)다. 낮은 처마와 나무 기둥이 있는 건물은 도시의 기차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첫 인상은 시골 마을 사랑방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중에서

김유정역에서 시작하는 문학 산책

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옛 김유정역이 보인다. 지금은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다. 역사 안에는 흑백사진과 오래된 승차권, 역무원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어 마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듯하다. 바깥으로 나오면 녹슨 철로 위에 무궁화호 열차 한 대가 서 있다. 지금은 관광안내소이자 북카페로 활용하는 공간이다. 열차 곳곳에 적힌 글을 읽으며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안내소 직원이 역무원 복장을 하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며 살짝 귀띔해준다.

열차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김유정문학촌에 닿는다.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란 실레마을에 조성된 공간으로, 김유정기념전시관과 생가, 김유정이야기집 등이 모여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작가의 삶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져 있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실제 원고와 초판본이 놓여 있고, 한편에는 김유정의 방을 재현해 두었다. 작은 책상 위 원고지와 펜, 그리고 낡은 책들. 이곳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이 쓰였겠구나 싶다.

전시관을 나오면 김유정 생가가 있는 마당으로 이어진다. 초가지붕 아래 낮은 처마와 오래된 나무 기둥, 그리고 작은 방들을 보며 옛 농촌의 집이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싶다. 장독대가 놓인 마당 쪽으로 가면 익숙한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소설 <봄봄>의 동상이다. 점순이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재보는 그 장면. 장인이 점순이의 키가 아직 덜 컸다며 혼인을 미루던 소설의 이야기가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온다. 마당 한편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있어 잠시 머물며 쉬어 가기에도 좋다.

김유정이야기집에는 특별 전시 공간과 함께 김유정의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상영하는 영상실이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어 잠깐 앉아 한 편 끝까지 보고 가도 좋겠다.

“장인님! 인젠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은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안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봄봄> 중에서

소설의 배경이 된 실레마을

실레마을은 김유정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가 남긴 30여 편의 작품 가운데 10여 편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김유정의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에는 실레마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그의 설명처럼 실레마을은 낮은 집들과 밭, 그리고 마을을 따라 좁은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실레마을이야기길’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김유정 작품을 소개하는 글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방금 지나온 논밭과 돌담길이 소설 속 장면처럼 겹쳐 보인다. 특정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은 아니지만 풍경 자체가 이미 문학인 것이다.

걷다가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실레책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담한 공간 안에 책과 소품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다. 벽 한쪽에는 김유정 작품과 문학 관련 책들이 꽂혀 있고, 엽서와 책갈피 같은 소품들도 눈길을 끈다. 마을 속에 숨겨진 보물 같달까. 잠시 앉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실레마을 여행의 여운이 한층 깊어진다.

레일 위에서 이어지는 여행

실레책방을 나와 김유정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박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철길 위에 알록달록한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김유정레일바이크다. 옛 경춘선 철길을 따라 달리는 레일바이크는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두 사람이 함께 페달을 밟으며 철길 위를 달리는 자전거로, 속도를 내기보다는 주변 풍경을 천천히 보기를 추천한다. 기차를 타고, 마을을 걷고, 다시 철길을 따라 달리는 것까지. 모든 순간이 모여 김유정역 여행은 한 편의 장면처럼 마음에 남는다.

아!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동백꽃>에 등장하는 동백꽃은 사실 생강나무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생강나무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김유정역에 가야 할 이유다.

카페 봄촌

김유정문학촌 바로 옆에 자리한 카페 봄촌은 실레마을을 찾은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 가기 좋은 공간이다. 아메리카노 위에 곰돌이 모양 얼음을 띄운 ‘곰메리카노’가 대표 메뉴로, 귀여운 비주얼 덕분에 사진을 찍기에도 좋다. 옥수수카페라테와 흑임자크림라테 등 개성 있는 음료도 인기 메뉴다. 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크로플, 토스트, 케이크 등 다양한 베이커리 메뉴도 준비돼 있다. 카페는 1층과 2층, 테라스로 구성되어 비교적 넓고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강원 춘천시 신동면 실레길 26

유정명물닭갈비막국수

김유정역 인근에 자리한 유정명물닭갈비막국수는 40년 전통을 이어온 닭갈비 전문점이다. 치즈닭갈비를 포함해 철판닭갈비 등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선택의 폭이 넓다. 함께 곁들이기 좋은 막국수는 직접 뽑은 메밀면을 사용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감자전과 메밀전병 등 강원 지역 향토 음식이 마련되어 한 자리에서 춘천의 대표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원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