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은 ‘군’ 단위에 들어가는 작은 동네다.
골목골목 시골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향에 온 기분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어릴 적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았던 시골 할머니 댁에
온 기분이 들어서일까.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안락함에 작고 조용한 이 동네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경북 의성군은 서울 기준, 청량리역에서 KTX를 이용하면 편히 오갈 수 있는 동네다. 하루에 운영하는 기차는 몇 대 되지 않지만, 안동역에서는 1시간, 동대구역 기준으로는 1시간 30분 남짓 소요되는 곳이라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이런 편리함이 있는 데다가 최근 ‘촌캉스’가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의성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재석의 유튜브 프로그램 <핑계고>에서도 ‘깡촌캉스’ 특집으로 의성 여행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의성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는 중이다. 유재석과 게스트들이 여유로운 시골 생활을 누리고,
의성의
맛집에 가서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촌캉스’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덕분에 지난 3월, 산불로 인해 생활 터전을 잃어버렸던 의성 주민들은 미소를 되찾고 있다.
의성 탑리마을은 ‘레트로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곳이다. 정확한 명칭은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다. 신라 시대 때 세워진 오층 석탑이 있어 ‘탑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중심과도 같은 ‘탑리리 오층석탑’은 내비게이션에 ‘의성탑리리오층석탑’을 검색하고 가면 된다.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먼발치에서 탑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 담벼락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높이 9.56m, 기단 폭은 4.51m 석탑의 일부분에서는 전탑 수법과
목조건물 양식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적인 구조 덕분에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마치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작은 규모라서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그리 많이 소요되지는 않는다. “사진도 찍고
가요”라는 친절한
마을 어르신들의 한마디가 정겨워 괜스레 발걸음을 더디게 옮기느라 걸리는 시간을 제외하곤 말이다.
석탑 주변을 맴돌다가, 마을 어르신들이 석탑에 나란히 모여 앉아 더위를 피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탑리마을 산책에 나서본다. 석탑을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마을의 모습은 1980~1990년대 그 어디쯤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지금은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그 자체로 레트로한 느낌이 물씬 나는 서울세탁소부터 옛날 드라마에서 봤을 법한 전파사, 금은방, 다방 건물이 마을 산책을 흥미롭게 해준다. 여기서는 건물을 배경으로 필히 사진을 남겨둘 것을 추천한다. 훗날 사진을 꺼내봤을 때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을 선사해 줄 테니까.
마을 벽화를 따라 골목골목에 숨은 레트로한 감성을 지나오면, 탑리 마을에서 꼭 방문해 봐야 한다는 금성(탑리) 버스터미널에 다다른다. 이곳은 명절과 같은 때에는 고향을 오가는 사람들로 들끓었던 버스터미널이었으나, 이용객이 줄어들어 정차용 정류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아직도 버스터미널에서 보던
매표창구와 버스 시간이 적힌 표지판이 있지만, 대부분은 해암 김재도 사진작가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독도 전문 사진작가’로 유명한 김재도 작가는 1년에 3~4회씩 전시회를 열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로 변신한 버스터미널은 주민들과 오가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쉼터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크기지만, 꾸준히 운영되어 앞으로는 더 많은 작가의 작품이 걸리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문국은 의성에 있던 소국(小國)인데, 삼국시대 초기의 작은 부족국가였으나 5세기 전후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사라진 곳이다. 조문국사적지는 조문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 유적지다.
입구에 자리한 정자 ‘조문정’을 지나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능’이 보인다. 여기에는 조문국 경덕왕의 고분을 포함해 약 374기의 고분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능선에 지속적으로 조성된 대규모 고분군이 확인되어 발굴 조사를 거친 결과, 금동관, 금동장식, 은제관식 등이 출토되었다고. 현재는 조문국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걷다 보면 마치 경주의 대릉원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공간은 더 넓고 능은 낮다. 늦여름부터 초가을까지는 초록빛 세상이지만, 봄이 한창인 5월에는 작약이 만개해 꽃놀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른 새벽. 안개가 무성할 때나 해가 질 무렵 경치 또한 장관이라고. 하지만 꽃, 안개, 노을이 없을 때
찾더라도 아쉬움이 들진 않는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눈에 담기는 사적지의 고요한 풍경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이 드니까. 조용한 여행을 꿈꿔왔던 사람에게 이거면 충분하니까.
1940년 문을 연 탑리역은 중앙선 화물과 승객의 수송을 도와온 역이다. 문을 열 당시는 다른 시골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철도산업 개량화 사업 목적으로 1997년 12월 새롭게 준공되었다. 마치 역 전체가 하나의 성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는 ‘금성산성’이라 불리는 금학산 고성의 모습을 바탕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