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일 백일장

KTX 진주역사 晉州驛舍
이야기

글. 부산경남본부 함안역 김진원 역장

일제 강점기 때 삼랑진~진주 철도 개통에 따라 1925년부터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진주역은 2012년 12월에 지금의 현 역사(驛舍)로 이전되었다.
진주역사의 면적은 3,775㎡로 역무동과 기술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말 기준 고속열차 36회, 일반열차 18회, 하루 54회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으며, 연인원 60만 여명의 승객이 진주역을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진주역(晉州驛)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경남의 중요 관문이며, 특히 KTX는 서울 등 원거리 이동을 하는 시민들의 교통편의 증대와 함께 시간 단축을 통한 대도시로의 접근성 향상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역사(驛舍)가 나름의 특색 있는 디자인으로 그 지역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진주역은 전통적인 건축양식인 한옥(韓屋)형태의 기와로 건축한 건축물로써 그 웅장함과 미학적 완성도에서 전국 역사(驛舍) 중 최고의 건축물(建築物)로 평가받고 있다. 승강장의 지붕까지 회랑(回廊)을 형상화한 기와로 건축된 역사(驛舍)는 진주역이 전국에서 유일하다.

이처럼 특색 있는 진주역의 역사 형태이지만 진주역사(驛舍)
건축의 모티브가 된 역사적 건축물이 진주객사(晉州客舍)인 점은 많은 사람이 잘 모르고 있다. 객사(客舍)는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한 관사였는데, 객관(客館)이라고도 했으며 지방의 수령은 연초, 동지, 임금의 생일날 또는 국경일에 객사에 모셔진 전패(殿牌)에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또 그 지방에 파견된 중앙의 관리가 기관장으로 부임할 때도 먼저 객사의 전패에 배례하고 소속 기관에 출근하였다.

또한 객사는 외국의 사신들이나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중요 거점 고을에 설치한 객사의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패에‘전(殿)’자를 새겼는데 조선 말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제를 상징하는‘궐(闕)’자를 새긴 나무패인 궐패(闕牌)로 바뀌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조선에서는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고을을 다스렸는데(중앙집권제) 고을마다 왕권의 상징인 객사(客舍), 고을 수령 집무실인 관아(官衙), 유학을 가르치는 향교(鄕校) 등을 세웠다.

진주객사(晉州客舍)와 관련한 의미 있는 역사적(歷史的)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있다. 다산은 진주 목사(牧使)를 지낸 정재원의 4남으로 태어났는데 지방관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다녔으며 젊은 시절 진주를 다녀간 적이 있다. 1782년 19살에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인 그의 장인 홍화보(洪和輔)의 초청으로 부인과 함께 진주를 방문 진주객사(晉州客舍)에 머물면서 촉석루(矗石樓)에서 장인이 베풀어준 연회에 참석하여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妓生)에게‘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 했으며, ‘진주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를 지어 촉석루 내 의기사(義妓祠)에 걸게 하였다.

오랑캐 바다를 동쪽으로 바라보며 숱한 세월 흘러
붉은 누각 산과 언덕을 배고 있네
그 옛날 꽃 핀 못에는 가인의 춤추는 모습 비추었고
단청한 기둥엔 장사(壯士)가 머무는 듯
전쟁터로 봄바람 불어 초목을 휘여 감고
황성에 밤비 내려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지금도 사당에 영령이 계시는 듯
한 밤중에 촛불 밝히고 술잔을 올리노라

- 정약용

10년 후인 1791년 서른 살에 당시 진주목사(晉州牧使)이던 부친을 만나기 위해 진주를 재방문하여 ‘재유촉석루기(再遊矗石樓記)를 짓기도 하였으며, 다음해 그의 부친 정재원이 근무지인 진주에서 갑자기 별세하였는데, 그 후 다산의 진주 객사 방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1801년 정조 승하(昇遐) 후 다산은 신유사옥(辛酉邪獄)의 박해를 받으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18년 동안의 귀양생활 동안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목민심서(牧民心書)는 현대에 들어서 공직자(公職者)들의 청렴교육(淸廉敎育)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모든 공직자의 필독서(必讀書)로 되어있다.

전통한옥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해서 건축한 진주역사에서 2012년부터 2018년 까지 근무를 하면서 나도 두 번 정도 마음 졸인 때가 있었다. 2015년, 2016년 울산과 경주에서 진도 5.0이상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진주역 부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진주에서도 주택과 건물의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역사 건물의 안전성, 특히 역사(驛舍) 지붕의 기와가 파손 되지는 않았는지 염려가 되어 관련 부서 직원들과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다행히 그 때마다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세삼 전통 한옥의 견고함과 안전성에 믿음이 갔다.

이렇듯 대궐같이 웅장하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현대식으로 건축한 아름다운 驛舍,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 말살정책을 펴면서 진주객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재판소(법원)를 설치 운영하다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의 주거공간으로 변모하여 원래 진주객사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 가슴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진주역사로 재탄생하여 시민들과 여행객들의 친근한 건축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코레일의 KTX개통 20주년과 함께 KTX진주역 개통 12주년의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진주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오늘도 철도를 이용하는 고객과 진주역을 찾아주는 방문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의 성과가 고객과 시민들의 성원위에 이룬 소중한 결과임을 잊지 않고, KTX의 높은 서비스 품질과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미래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책무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이다. 그 옛날 진주객사(晉州客舍)가 나라의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예를 갖추고 정성을 다했듯이 우리지역을 방문하기 위해 KTX 진주역사(晉州驛舍)를 이용하는 모든 시민과 철도 이용자들에게 항상 진심을 다할 것이다.

현 진주역사 역무동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