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자신의 배경과 현재 처해진 상황, 그리고 시기에 따라 받는 느낌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어렸을 때는 둘리를 보며 고길동을 천하의 악마이자 나쁜 놈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피 한 방울 안 섞이고 갈 곳 없는 천방지축들을 하나하나 거두어주고 그들이 가재도구를 박살 내도 점잖게 혼내고 인내하는, 훌륭한 가장이자 어른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여러 요인이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데, 직업도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또한 현직 의사가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은 앎의 수준에 따라 관점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철도 또한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어왔다. 이번에는 철도인이 보면 더 재밌는 영화 2선을 뽑아왔다.
단 한 순간의 부주의와 실수로 무인 상태로 폭주하게 된 39량짜리 열차를 멈추기 위해 베테랑 기관사와 차장이 고군분투하는 액션영화이다. 줄거리만 보면 단순하고 큰 서사가 없어 보이지만 이 영화는 액션의 끝을 보여준다. 거기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 생생하고 속도감 있는 연출 등 여러 요인 덕분에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하지만 나를 이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줬던 요인은 내가 철도인, 그중에서도 수송원이라는 점이다. 조차장, 선로전환기, 연결기, 수제동기 등 실제 업무에서 보고 직접 하던 것들을 영화에서 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극 중 자리를 이탈하는 기관사, 무관통으로 입환하는 수송원을 보며 ‘곧 큰 사고가 터지겠구나’ 생각했다. 업무 현장에서 화차를 보고 있으면 가끔 질주하는 화물 열차 위를 질주하며 수제동기를 감는 덴젤 워싱턴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진 나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수제동기는 움직일 때 감는 것이 아니라 서 있을 때 감는 것이다.
홋카이도 폐광 마을의 간이역 역장 오토마츠는 가족보다 철도를 우선하며 살아왔다. 폐역을 앞두고 그는 붉은 코트 소녀를 만난다. 어린 시절 잃은 딸의 환상인 듯한 소녀는 그의 곁을 맴돈다.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을 묵묵히 견뎌온 오토마츠는 폐역을 앞두고 과거를 회상하며 외로움과 그리움에 잠긴다. 마지막 근무 후, 눈 덮인 철길에서 그는 환상 속 딸을 만나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전체적으로 매우 조용하고 아름다운 영화이다. 20대 때, 단순히 내 첫사랑 히로스에 료코가 출연한다하여 무턱대고 봤다가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또한 철도인의 필청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입사 후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되었다. 처음엔 눈이 많이 내리는 폐광 마을의 간이역이라는 점이 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역과 아주 똑 닮아서 흥미를 가지고 봤다가 영화 마지막 쯤엔 눈물 콧물 펑펑 쏟아냈다. 그 후 영화가 끝난 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표를 주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좋은 영화이다. 오토마츠는 역장이라는 본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딸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훌륭한 직원이지만, 형편없는 가장이다. 더불어 명장면마다 깔리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Railroad man도 너무 좋은 음악이니 꼭 들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