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어때

사유의 정원에서
내 안의 숲을 거닐다

INTRO

생각에 잠긴 수목원이 있다. 360°로 숲이 물결치는 거대한 산자락에서
사색하는 사람들이 하염없이 걷는다. 두 개의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사유원(思惟園)은 세계에서 유일한
형태의 산지정원이다. 번잡한 도시의 삶에 지쳤다면, 기꺼이 품을 내어준 대자연 속을 천천히 거닐어보자.
사색의 숲에서 나를 마주하고 돌아가는 길엔 새로운 채움이 일상으로 향할 것이다.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시작은 비움으로부터

기실 첫 방문이라면 사유(思惟)는 접어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발길 닿는 곳마다 감탄하며 넋 놓고 감상하기 바쁠 테니 말이다. 사유원은 건축계의 거장 알바로 시자(Alvaro Siza)와 승효상이 참여하고, 세계적인 조경가 정영선과 카와기시 마츠노부가 정원을 다듬는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지극한 손길로 만들어졌다. 이곳의 두 주인공인 자연과 건축물은 서로의 공간에 깃들어있거나 숨어있고, 때로는 비에 젖거나 바람에 흩날리기도 하며, 요즘은 따사로운 볕을 받아 달콤하게 익어간다.
‘극도의 비움에 이르러 지극한 평온을 지킨다’는 도덕경 구절을 일깨우는 치허문(致虛門)이 사유원의 정문이다. 입구에서 지도와 물병, GPS 추적이 가능한 목걸이를 받았다면 이제 머릿속을 비우고 출발하면 된다. 팔공산 능선과 계곡을 품은 30만 평의 순례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어디든 향할 수 있도록 가능성이 열려 있다. 첩첩산중에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고개를 내민 소대(巢臺)와 마주친다면 사유의 공간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소대는 소요헌(逍遼軒)을 전망하는 건축물로, 둘 다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Y자로 설계된 소요헌 도면은 당초 전쟁의 비극을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전시를 위해 스케치해둔 것이었다. 사유원 측이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군위 지역의 상처가 게르니카의 고통과 유사하다’고 시자를 설득한 끝에 작품을 유치했다. 두 갈래로 나뉜 길은 점점 높아지다 빛의 정점에 매달린 붉은 조형물에 이르고, 작은 길은 점점 낮아지다 ‘생명의 알’에 다다른다. 한쪽은 죽음을, 다른 한쪽은 삶을 뜻하니 양쪽 다 가보길 권한다.

마음 가는 대로, ‘풀코스’ 사색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고, 태양이 기운다. 내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자연의 선율이 문득문득 따뜻하게 느껴진다. 산 하나가 통째로 미술관인 사유원은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면서 매 순간 생동하는 자연이기도 하다. 소요헌을 나와 산기슭으로 내려가면 야생동물이 물을 마시고 가는 생태연못 사담(思潭)으로 이어진다. 숲 가장자리에 대나무로 지은 조사(鳥寺)는 ‘새들의 수도원’이란 뜻 그대로 새를 위한 건축물이다. 세월이 지나면 썩어 넘어져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외딴 장소에 누워 있는 와사(瓦寺)는 절 수도원이다. 천장과 벽면에 뚫린 구멍에서 스며든 빛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문양을 새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달큰한 향에 이끌려 언덕을 오르면, 오랜 풍상을 이겨온 108그루의 모과나무가 얼기설기 들어앉은 모습과 마주한다. 사유원 탄생의 원초적 공간인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이다. 평균수령 525년에 달하는 모과나무 군락 속, 무려 654년을 살았다는 1370년생 할아버지 모과나무가 우람한 풍채를 뽐낸다. 이제는 속이 텅 비어버렸지만, 긴 세월 많은 이에게 열매와 쉼터를 내어준 나무다. 대구 향토기업인 태창철강 유재성 전 회장이 일본으로 반출되려던 모과나무 4그루를 사들인 게 사유원의 시작이었다. 2021년 개원하기까지 15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는데, 풀과 나무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연의 시간을 기다린 셈이다.
그래서일까. 사유원 내 모든 시설은 모난 데 없이 자연스럽다. 사유원을 방문하게 된다면 유명한 건축물들이 자연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놀랄 것이다. 소나무 숲속 한가운데 앉힌 찻집, 현암(玄庵)에선 정향나무 꽃이 지면 잎을 따서 차를 빚는다니, 6월 중순쯤이면 싱그러운 정향차를 맛볼 수 있을 듯하다.

나를 비우고, 채우다

숲길마다 새로운 경관이 펼쳐지고, 주인공이 바뀐다. 좌우로 짝을 이루는 능허대(凌虛臺)와 행구단(杏丘壇)은 팔공산맥을 내려다보며 물에 발을 담그고 사색할 수 있는 곳이다. 사유원의 전망대인 명정(暝庭)에서는 좁은 통로와 어둠, 벽 사이로 내려오는 빛이 방문자들을 기다린다.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이미 많이 봤으니, 이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승효상 건축가의 뜻이 담겼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서너 시간 무념 산책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나’를 비우고, 새로 채우는 시간이 찾아온다. 사실 사유원에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 없다. 한가로이 거닐며 하염없이 응시해도 좋을 자연이니, 잠시 길을 잃어도 좋다. 삶에 정답이 없듯 산책에 정답도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둘러보면 그만이다. 평일 입장료가 5만 원인 사유원은 방문객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평일에는 300명, 주말에는 350명까지만 입장할 수 있다. 숲과 내가 1:1로 오롯이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명상을 이끌어내는 평화로운 공간의 가치를 체득하려면 최소 한나절은 잡아야 한다. 전부를 둘러보려 애쓰지 말고 ‘내 마음’을 흔드는 몇 공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침묵하고 덜어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음을 채우고 내면의 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사유원

대구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50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무)
평일 50,000원, 주말 및 공휴일 69,000원 한 달 단위 오픈, 홈페이지(sayuwon.com) 사전 예약 필수

추억 실어 나르는 아날로그 간이역

군위에서 유일하게 여객열차가 정차하는 역, 화본역은 1938년 운행을 시작했다. 꽃의 뿌리. 그 이름처럼 화본역은 ‘네티즌이 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에 이름을 올렸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드라마 <손현주의 간이역>에도 등장했다. 수많은 사람이 이용하던 역이었지만 이제는 상행 3편, 하행 3편만 지나는 작은 간이역이 됐다.
대합실 안에는 옛날 역무원들이 쓰던 낡은 소품들이 전시돼 있고, 정원 옆에는 이제는 달리지 않는 2량의 기차가 서있다. 새마을호 객차를 활용한 레일 카페다. 철길 건너 드넓은 들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면 급수탑이 나타난다. 1930년대 말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급수탑은 이제 담쟁이넝쿨에 제 존재를 내어주고 서있다. 규모가 상당한데, 경북 내륙의 험난한 지형을 달리려면 그만큼 강한 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은 창 속 고양이는 소녀를 바라보고, 소녀는 마치 기차를 기다리듯 먼 곳을 내다보는 모습의 동상도 시선을 끈다.
정겨운 옛이야기가 흐르는 화본역에 열차가 드나드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 12월 중앙선 복선 전철화 공사가 완료되면 화본역은 폐역 수순을 밟게 되니, 아날로그 기차여행의 낭만을 즐기고 싶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화본역

대구 군위군 산성면 산성가음로 7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