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복被服 담당자는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엄마 옷은 왜 입는 줄 알아?
우리 몸을 다치지 않게 지켜주려고 입는대~ 오랜만에 마음에 닿은 말이었다. 나는 철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직원들께 피복을 지급하는 피복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피복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被服)는 사람의 몸에 입는 모든 종류의 옷을 통틀어 이르는 의미, 다른 하나(被覆)는 물건을 보호하거나 기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겉을 다른 물질로 씌우거나 입히는 것을 뜻한다. 피복 담당자에게 피복은 첫 번째 의미의 피복이라기보단 두 번째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어가 <물건>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물건>이라는 단어를 <직원>이라는 단어로 치환해보자. <직원>을 보호하거나 기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복 혹은 작업복>으로 입히는 것, 이 얼마나 탁월한 일인가.
그 탁월한 일을 주관하는 피복 담당자는 어떨까?
오늘은 나의 업무를 살짝 소개해보고자 한다. 먼저 피복 업무는 크게 발주, 제작, 배송 세 단계로 나뉜다. 제작과 배송은 업체 주도하에 이루어지므로 지역본부 피복담당자가 대체로 하는 일은 바로 발주 업무이다. 상당한 수의 피복을 지급 해야하므로 하복은 겨울에, 동복은 여름에 발주를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도 적시에 피복을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먼저 직원 본인이 선택한 피복과 정해진 수량의 예비품 및 신입직원의 옷을 시트에 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이 때, 피복 담당자의 첫번째 위기가 시작된다. 다음 해의 예비품과 신입직원의 사이즈를 예상해서 수량을 산정하는 일이다. 보통 현품 기준 가장 부족한 사이즈와 가장 많은 직원들이 착용하는 사이즈에 따라 수량을 정한다. 물론 다음 해에 어떤 체격의 신입직원이 들어오고, 인사이동이 있을지 100% 예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 그 일을 발주할때마다 고뇌하며 진행한다. 늘 이상하리만치 부족한 사이즈가 생겨 다소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산 편제, 사이즈, KOVIS 등 특정 기준에 맞춘 다수의 시트를 만들어 회계 처리까지 끝나면 피복이 제작되어 배송된다. 이 때 담당자의 두 번째 위기가 시작된다. 이 피복, 무던하게 제작되어 배송될 것 같은가? 우리 회사의 직원이 3만명이다. 피복을 입지 않는 본사, 본부의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2만개 이상의 피복이 필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에 있을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 눈이 오던 날 시작했던 발주한 피복이 30도가 넘는 초여름이 되어도 오지 않을 수가 있다. 이 시점부터 담당자는 피복 요청 연락이 쇄도한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유야무야 넘기기도,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다. 그래서 담당자는 입고 날짜에 피복을 받기 위해 업체에 독촉 전화를 시작한다. 동시에 제때 맞춰 도착하는 피복 상자들을 맞이한다. 상자를 옮기고 품목을 확인해 재고를 정리한다. 이 행위를 10번 이상 반복하면 한여름이 성큼 온다. 그리고 동계 피복의 발주가 시작된다. 그렇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동계 피복의 발주를 시작했다. 하계 피복을 발주하며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 발주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마쳤다. 다수의 본부 스탭이 그렇듯 나 또한 피복 이외에도 맡은 업무가 있다. 종종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주는 업무가 피복이기에 이 글에선 피복 담당자임을 강조했을 뿐이다. 피복, 한낯 섬유에 불과한 이게 뭐라고 한 해, 반기, 분기, 혹은 매일 나에게 과업을 주는가. 그러나 나의 업무는 이 섬유덩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할을 주는 일이다. 그 것이 나의 소명이기에··· 그래서 피복(被服) 담당자는 오늘도 피복(被覆)합니다.